Essay
남태령에서
남태령이란 이름 자체도 처음 들어봤다. 관악구, 서초구와 경기도 과천 사이에 있는 고개이자 4호선에 있는 역이름으로, 일요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태령 역사 내에는 인파가 그리 많진 않았다.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는 시민들과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면, 더 힘들고 지치는 싸움이 될 테니. 역 안 여자 화장실에 그나마 여성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온갖 용품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생리대, 핫팩, 간식들이 쌓여있길래 핫팩을 하나 챙겼다. 어제부터 시작된 시위인데 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보내준 걸까.
이 소식을 접하고부터 말도 안 되는 일, 하며 고개를 젓게 됐다. 전남, 수원 등에서 올라온 농민들은 30여 대의 트랙터를 몰고 행진하고 있었다. 서울로 진입하려는 트랙터들을 경찰이 난데없이 막았다. 버스로 막고는 트랙터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해서 일을 키운 건 경찰 측이다. 뭐가 두려운지, 그저 진입일 뿐인데 진압하려 했다. 하필 가장 추운 동짓날, 12월 21일이었다. 2시부터 농민들은 양방향 도로에서 차단당한 채 경찰의 억압을 버티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경찰이 새벽에 트랙터를 들어낼까 걱정하며 발을 굴렀다. 시민들은 광화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태령에 합류해 저체온증에 걸려 가며 농민 곁을 지켰다.
나도 아침에 깨자마자 남태령으로 달려가 합류했다. 밤을 새운 자들의 뒤를 이어 머릿수를 채웠다. 가보니 다들 자신이 가진 것들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물!” “핫팩!” 크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생필품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왔고 젊은 우리는 그런 소소한 것들이 귀엽고 웃겼다. 그 힘으로 추위를 잊어보려 했다. ‘만만하니’, ‘붉은노을’ 노래들 가사 속에 ‘차 빼라!’ ‘탄핵’ 구호를 넣어 외쳤다.
이날의 자유발언들은 유독 진취적이었고 문장마다 마음에 박혔다. 즉흥 발언인데도 명료하게 생각이 정리돼 있었다. 그들이 그 마음으로 오래 살아왔기에, 실천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가능한 말들이었다. 행동을 말이 이끌고, 말을 행동이 이끌었다. 발언자 중 일부는 성소수자, 농부, 비정규직 노동자, 어린 10대 여성, ‘정치 천민’이라고 (정치적 의견을 내는 것이 어려워서) 스스로 자조하는 교사 연수생 등이었다. 그들은 후회하기 싫어서 여기 나왔다고 했다. 나 또한 여기 온 것은 본능이 시킨 일에 가까웠다. 남태령에 갇힌 농민들 소식을 접한 다음 날 아침, 별 고민도 없이 바로 뛰쳐나갔다. 농민들이 키운 쌀과 식재료를 먹고 자란 사람으로서 외면하기 힘든 무언가 있었다. 씨앗 하나가 발아하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우리에겐 처음인 것들이 많았다. 농민분들은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농민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지켜준 것이 처음이라며 눈시울을 붉히고 어안이 벙벙해하셨다. 시민들도 농민과 함께 연대한 경험이 (대부분) 처음이었다. 도시-지방으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세대가 달랐으며 (2030 – 5060) 함께 뭔가를 할 기회가 없었다. 평소에 농산물을 먹으면서도 농민들의 얼굴과 연결 지을 줄 몰랐다. 부끄럽지만 윤석열이 양곡법을 거부한 사실조차 나중에 알았을 만큼 관심도가 낮았던 것 같다. 그만큼 농민들은 소외되어 외로운 싸움을 오래 해왔다. 시민들은 그것이 미안해서 경찰에 맞서 목소리를 더 크게 냈다.
남태령에서, 우리는 다 같이 ‘농민이 최고야’라는 트로트를 부르며 엄지척을 했다. 농민분들은 연신 고마워하셨다. 둘러보니 일반 시위보다도 젊은 여성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를 볼 수 있었다. 기득권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묻혔던 약자와 여성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하는 것, 불현듯 뭉치고 뻗어 나가는 변혁을. 가장 추운 날에도 아침의 햇살은 비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농민에게로 향한 마음은 또 다른 약자들에게로 퍼져나가길, 트랙터와 여성들의 노래가 멈추지 않고 누군가를 살리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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