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인디아나 존스와 좀비개미버섯
나의 첫 장래 희망은 고고학자. 10살 즈음 엄마 아빠가 보여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신세계였다. 어드벤쳐 영화계의 고전 명작, 이 시리즈는 작은 TV 화면을 뚫고 세상을 보여주었다. 나치에 맞서 보물을 지켜내는 서사,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주인공의 모습과 경쾌한 음악에 손톱을 계속 깨물며 돌려 봤다. 이전까지 집에서 책만 읽던 소녀의 심장은 위험을 감지하고 떨었다. 인디아나 존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며 보물을 찾고 역사를 추적하고 싶었고, 고생 끝에 보물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 고고학자 서사는 지루한 매일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라고 부추겼다. 종종 학교 놀이터 철봉 위에 올라가 땅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끔 낯선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집에 가는 길을 새롭게 걸어봤다. 그러나 집 근처에 보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더 먼 곳으로 가야 했다.
롤러스케이트로는 좀 더 먼 곳도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구와 남동생과 자주 롤러스케이트를 탔다. 내 고향 수원 영통구 아파트 단지에는 나만 알 수 있는 경계선이 있었다. 그 선은 대단지를 구획 짓고 있었고 단지 밖으로 나가면 집에 돌아오기 힘들 거라는 느낌. 자주 아파트 바깥에 있는 큰 도로변까지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내 모험은 딱 거기까지였다. 대신, 내겐 언덕을 내려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아파트들 사이엔 경사길이 하나 있었는데, 친구와 남동생이 망설일 때 나는 휙 소리를 내며 내리막길을 갈랐다. 그런 용기도 인디아나 존스가 내게 준 것이다. 트럭 밑에 들어가 위험할 뻔한 날에도 나는 친구를 돌아보며 웃었다. “야 진짜 재밌었다. 그치?”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벗어날수록 자유로워져서 진짜로 웃었다. 중력에 이끌리듯이 다시 집으로 가야 했지만.
언젠가 학교 미술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오늘의 그림 주제를 공개했다.
“오늘은 각자 장래 희망을 그려볼까?”
옆에 앉은 짝꿍이 내게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래 희망이 뭐야?”
“음, 되고 싶은 미래… 직업?”
내 직업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지. 필요한 색연필만 쏙쏙 뽑아 빠르게 그렸다. 완성된 그림 속엔 머리를 묶은 여자가 사파리 옷을 입고 동굴 속에 있다. 그 여자는 주머니에 지도를 꽂고 왼손엔 돋보기를 든 채, 벽화를 보고 있다. 선생님이 그림을 못 알아볼까 봐 직업 이름도 옆에 써놨다. ‘고고학자’라고, 서명을 써넣듯이. 옆에 앉은 짝꿍은 또 물었다.
“고고학자가 뭐야?”
얘는 모르는 것도 많네. 인디아나 존스도 안 본 모양이지. 나는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며 설명했다.
“어, 세계 역사와 언어를 배워서 보물들을 찾는 거야.”
“흠 그래?”
짝꿍은 흥미를 잃고 자기 그림에 열중했다. 슬쩍 보니 청진기를 든 의사를 그리고 있었다. 내 뒤의 애는 대통령을 그렸고, 앞의 애는 가수를 그렸다. 나는 그렇게 뻔한 어른이 되기 싫었다. 학교의 유일한 ‘고고학자’ 꿈나무로서. 그러나 점점 알게 되었다. 그 꿈이 현실성이 별로 없다는걸. 주위 사람들이 내 꿈을 비웃고 낯설어하자 주눅이 들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는 시기가 왔다. 나는 자못 진지하게 거실 소파에 앉아 부모님께 선언했다.
“사학과에 가고 싶어.”
고고학과와 현실의 타협 버전이 사학과였다. 부모님은 화들짝 놀라 극구 말렸다.
“얘, 거긴 배고픈 학과야. 돈을 못 벌어. 너는 책을 좋아하니까 차라리 국문학과에 가.”
그때 부모님은 내게 모험 영화를 보여줬던 걸 후회했을까? 그 꿈을 커서까지 품고 있는 딸이 어처구니없었을까? 그런 부모님의 대안이 국문학과라는 것도 어처구니없긴 하다. 사학과와 막상막하로 배고픈 학과에 가라니. 나는 또 별생각 없이 국문학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불행히도. 국문과에 입학하자 한 학년 선배들이 과가(학과생들이 부르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 노래의 첫 마디는 이랬다. ‘우리는 국문과, 백수건달’. 나는 문과 출신 백수에 가까워지며 고고학자로부터 영영 멀어졌다.
그러나 그 모험 DNA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세계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몸을 변형해서 꿈틀거린다. 이 열망을 다스리는 건 내 평생의 숙제다. 직장인일 때는 시간 때문에, 결혼한 지금은 자금 때문에 여행을 잘 못 간다. 꼭 1년에 한 번은 1주일이라도 해외로 떠나고 싶어 근질거리고 우울증이 심히 도진다. 환경 파괴 때문에 볼 수 있는 땅도 점점 줄어들 텐데 하며 조바심이 든다. 남미, 아프리카, 미지의 정글과 사파리, 사하라, 오로라를 갈망하는 내 모험심은 끝이 없다. 남편과 나는 가끔 넷플릭스의 ‘아워플래닛’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본다. 남편은 감탄 정도로 끝내는 사람이고, 나는 그걸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내 발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남편, 저기 정글을 직접 보고 싶지 않아?”
“아니 전혀.”
그 다큐멘터리에서 ‘좀비개미버섯’을 보았다. 그 버섯은 숙주인 개미를 감염시키고 행동을 조작하여 죽게 만든다. 버섯은 개미의 몸을 잠식해서 뚫고 자란다. 여행 욕심이 날 때마다 생각한다. 형편에 안 맞는 꿈을 꾸는 건 나를 갉아먹는다고. 꿈이 나인지 내가 꿈인지 헷갈린다고. 그러다 숙주인 내가 잠식되어 그냥 여행을 떠나서 좀비개미버섯을 보고 싶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세계 일주라는 꿈은 내 몸보다 거대해서, 현실에 잡아먹히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잡아먹고 있다. 이상한 집착 행동으로. 내 행동 양식은 집을 멀리 벗어나야 자유롭도록 세팅되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걸까. 그때 인디아나 존스를 보지 말걸.
*좀비개미버섯은 징그럽게 생겨서... 사진을 안 넣습니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