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민속학개론 과제 : 삼각산 도당제 굿판
국문과 전공 수업 중엔 '민속학개론'이 있다. 국문과생들은 민속학 수업에서 전통 제의와 무가(巫歌)를 배운다. 고대 구비 문학은 거의 토속 신앙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심지어 굿을 견학하고 감상을 쓰는 과제도 해내야 했다. 그렇게 2012년 1학기엔 친구 1명과 함께 '삼각산 도당제'에 가게 되었다. 삼각산 도당제는 매년 음력 3월 3일에 우이동 뒷산에서 도당 산신을 모시는 제의로,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42호로 지정됐다. 삼각산은 태조 이성계가 가장 중요시한 영산으로, 부족 국가 때부터 기우제를 비롯한 큰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우이동 주민들과 강북구의 노력으로 지역 전통 축제로 자리 잡았다고.
친구와 나는 굿판이 처음이라 조금 떨리기도 했다. 가끔 미디어와 책을 통해 접한 것이 전부였다. 직접 보면 신이 옮는 거 아니겠지...? 이런 옷 입고 가도 되는 거겠지? (우리는 캐주얼하게 청바지에 후드티 종류를 입고 왔다) 말을 주고받으며 우이동에 도착했다. 도심과는 뚝 떨어진 산골짜기 같은 곳에서 우리는 길을 헤맸다. 주변 가게 상인들에게 물어물어 삼각산 부근에 도착했다. 근처 마을회관에선 회갑 잔치를 여는지 앰프로 튼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렸다. 거기가 굿판인 줄 알고 요즘 굿판에선 트로트도 부르나 생각했다. 그러나 위에서 생경한 소리가 들리며 트로트에 섞여 들어왔고, 산 위에 오를수록 점점 더 소리가 커졌다. 장구, 북, 피리 소리 같은 거였다. 귀를 먼저 앞세워 굿판에 당도하니, 학교 운동장의 반만 한 산 중턱 마당엔 깔개가 깔려있었다. 흰 천막은 그늘을 드리우며 높이 솟아있고, 약과, 전, 과일 등의 제사 음식들과 돼지머리가 차려져 있고, 한복 입은 악사들 대여섯 명은 자리에 앉아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마당 앞에는 도당신의 신체로 여겨지는 신성한 나무가 파랗고 빨간 장식을 매달고 있었다.
우리는 깔개에서 좀 떨어진 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굿판을 지켜보았다. 과제를 위해 가져온 노트와 펜으로 메모를 끄적였다. 마을 주민들은 차례로 향과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여성 무당이 나와서 '본향거리[1]'라는 신 맞이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도 달래고, 장군님, 별상님, 신장님, 성주신을 모시고 열두거리[2] 놀음을 하는 것이다. 그 많은 신을 부르는 기가 대단했다.
도당제를 이끄는 박명옥 무당은 7살 때 신내림 받은 강신 기능 세습무다. (세습무는 신내림을 받지 않고도 굿을 할 수 있는, 예술적 성향이 강한 무당이고 집안 대대로 물려준다. 강신무는 신병을 앓고 신어머니에게 신내림을 받기 때문에 핏줄에 따라 세습하진 않는다.) 강신무와 세습무 두 특성을 모두 가진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비녀로 머리를 단정히 쪽지었고, 빨간 소매가 달린 파란 활옷[3] 형태의 무복을 입었다. 방울과 부채, 깃발을 번갈아 흔들며 중얼대다가 가끔 “하-!” 크게 소리치는 대목도 있었다. 그래서 덜 지루하게 볼 수 있었다. 춤, 무가, 음악이 결합한 종합예술은 ‘연행’이라 한다. 연행을 하는 그녀는 걸걸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마이크까지 달아 소리는 컸지만, 그 언어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주 방언 같기도 불경 같기도 판소리 공연 같기도 했다. “좋은 날이로구나~” 같은 말꼬리 정도만 알아들었다. “산신령님 앞에 이렇게 모여있으니 이뻐요, 안 이뻐요?” 하는 식으로 농을 치니 주민은 “이뻐요!”라고 화답했다. (어떤 사람은 ‘안 이뻐요’라고 했다) 반말로 웃으며 호통도 치는 욕쟁이 할머니 같았다. 저러다 돌변해 접신이라도 할까 마음 졸이며 보았는데, 편견을 비웃듯 내내 차분한 표정으로 굿판을 돌아다녔다. 눈을 감거나 뜨며 1시간 넘게 노래하는데, 대본 없이도 이야기를 펼쳐내는 천상 예술가로 보였다.
굿판 풍경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고 친숙해서 놀라웠다. 핏줄 안에 고대로부터 이어진 민속 요소가 들어있는지, 모든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무당은 타고난 기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한 사람씩 눈을 맞추었고 나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모두의 눈엔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과 열기에 차 있었다. 무언가가 간절했던 조상들은 신마다 여러 이야기 ‘거리’를 발전시켜 모든 신을 빠짐없이 모셔 왔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농사의 풍년, 마을의 안녕, 가축의 번식, 관계의 질서를 대를 이어 빌었다. 인생의 많은 것과 자연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무속의 힘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한 번씩 무당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면 파랬다. 인간의 바람 따위는 무심하게 내려다보듯이.
주민들은 한 해의 액땜을 치루는 것처럼 무당의 옷, 두 볼과 모자끈 사이에 지폐를 넣는 등 불경스러운(!) 행동도 했다. 그러면 무당은 신이나 무가를 더 크게 불렀다. 무가 연행은 여러 마디 단위로 나뉘어 있는데, 한 마디가 끝나자 어른들이 무당을 둘러싸고 몰려들었다. 백화점 마감 세일에 온 사람들처럼 점을 서로 보려고 경쟁했다. 흥분한 목소리들이 왁자지껄했다. 산신도 시끌벅적한 마당을 보고 껄껄 웃을성싶었다. 무당은 청, 백, 적, 흑, 황색의 오방신장기, 5개의 깃발을 잡고 주민들에게 손잡이 부분을 뽑게 했다. 음양오행의 다섯 신을 상징한단다. 어떤 사람은 깃발을 뽑고 "빨간색이다!" 소리를 쳤고, 제각기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화투를 뽑아보는 운세 점처럼 희비가 엇갈렸다. 그래도 다섯 방향에는 꽝이 없고 모두가 신이니까 어떤 색을 뽑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다 괜찮은 것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좋았던 건 무당 혼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간다는 거다. 악사들과 대잡이(대를 잡는 사람)가 있고, 팜플렛을 나눠주는 공무원과 행사를 돕는 주민분들이 있다. 어느 순간부턴 마을 어른들이 함께 제자리에서 뛰고 몸을 흔들며 춤추고 있었다. 판을 깔아주면 제대로 노는 흥의 민족다웠다. 음악은 더 경쾌해지고, 굿 관계자들은 떡과 음식 고물들을 관중들 입에 넣어주었다. 어깨춤을 추는 분들의 표정이 밝고 후련했다. 이런 날엔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내던지고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친구와 나는 2시간 가까이 있다가 앉은 자리가 쑤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민속학을 배우며 느낀 건 현대의 종교만큼이나 무속 신앙도 고도로 발달한 정신적 유산이며, 종합 예술 행위라는 것이다. 신분 차별도 없고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 인간적인 신앙이기도 하다. 현대 종교와는 문자로 정착되었냐 구비로 전승되었냐의 차이일 뿐, 서사 무가들 속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전체가 염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생의 시련도 피하지 않고 넣어놓았다. 누군가는 삶의 가치, 불가해성, 고통을 덧붙여서 또 후대에 전했다. 한 이야기는 수백 가지 버전으로 갈라져 왔고, 할머니의 할머니들은 여러 버전을 합쳐 동화로 각색해 들려주기도 했다. 많은 무가가 소실되었지만 일부는 녹음되거나 채록되어 남아있다. 잘 알려지지 않고 관심이 없었을 뿐. 너무 국문학과와 일부 학과에서만 그런 걸 배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사가 없어지듯 굿들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젊은 세대도 공감하고 호흡할 수 있는 굿판이 만들어질까? 친구와 얘기하며 삼각산에서 내려왔다. 내리막길은 가뿐했다. 여전히 마을회관에서는 지치지도 않고 트로트를 틀고 있었다. 이것보다 신나는 굿판을 우린 경험하고 왔다.
[1] 양가편의 본향을 맞아들이는 거리로, 여러 신령들을 모시고 작은 규모의 열두거리를 진행한다.
[2] 무가(巫歌)의 하나. '큰굿'에서 불려지는 각거리의 무가(坐歌)를 일컫는다. 신을 청하고 신탁을 받는 절차가 포함된다.
[3] 조선 시대에 대례복으로 입던 소매가 넓은 옷.
*2012년 썼던 글을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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