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봄으로의 초대
3월엔 새 계절을 맞이하는 과제를 받았다. 나 스스로에게서. 지난달엔 구매를 망설이는 사이 봄동의 제철이 가버렸다. 봄동으로 솥밥 요리를 하려 했는데 이제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채소의 제철이란 (특히 봄에) 반짝 나왔다가 쏙 숨어버린다는 걸, 요리를 자주 하기 전엔 몰랐다. 식재료마다 제철은 정해져 있고 날 기다려주지 않고서 금방 가버렸다. 기후 변화로 인해 계절이 피고 지는 속도를 따라잡기도 벅차다. 아직 난 웅크리고 있는데 벌써 봄이라니. 3월 초순을 지나자 빠르게 봄기운이 살아나고 있었다. 퍼뜩 봄맞이할 목록을 떠올렸다. 집 청소, 환기, 얇은 긴팔옷 사기, 집 테이블보 밝은색으로 바꾸기, 그리고 딸기!
마침 최근에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닮고 싶은 레퍼런스도 얻었다. 그 집엔 글자로 채운 종이들이 많았다. 벽에는 엽서를 달아놓았고, 책 페이지를 쭈욱 찢어 붙여놓았다. 작은 소품들과 단어를 사랑하는 따스한 성정이 보여서 사랑스러웠다. 봄기운이 솔솔 났다. 나도 내 공간에 온갖 시와 문장을 담은 메모, 엽서를 붙이고 싶다. 방 꾸미는 데 사진보다도 글씨가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력 안 좋은 내 눈은 글씨를 보기 위해 찡그려지고, 수천 번이고 행간 사이에 머무를 테다. 지겨워질 때쯤 다른 페이지로 갈아 끼워도 되고. (막상 시도하기엔 준비 기간이 필요해서 다음에 하기로 했다.) 내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는 욕망도 더 들었다.
계절 핑계로 사람들을 불러봤다. 소식이 뜸하던 단체카톡방에 대뜸.
“날이 좀 풀렸으니 집 초대하고 싶은데 어때? (찡긋)”
나는 평소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걸 즐기는 편인데,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면 뿌듯하기 때문이다. 요리들의 궁합을 맞추고,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비율을 따져보고, 계절을 고려한다. 손님들 식성, 대식가인지 소식가인지 등 수많은 변수를 고려해 메뉴를 선정한다. 아주 머리 아픈 작업이다. 한때는 집들이를 1주일에 1번 꼴로 한 적도 있었는데 재정과 마음 모두 바닥이 드러나기 쉬웠다. 요즘은 1달에 1번 정도 제한적으로 초대하는 편이다. 적은 인원을 더 정성껏 대접하도록.
집들이를 위해 장을 봐뒀고 추가로 살 게 있나 싶어 남편과 집 근처 시장을 구경갔다. 버스 창문 열고 달리기 좋은 날씨가 되었다. 18도의 신선한 날씨 앞에선 버스도 틈을 열고 숨을 쉰다. 기분 탓인지 승객들 표정도 한결 가벼웠다. 몇 정거장 안 가서 청량리 근처 경동 시장에 도착했다. 종로에 있는 광장시장은 ‘핫플레이스’라 외국인, 고령층, 젊은 층이 뒤섞여 터져나갈 듯한데, 이곳은 SNS에 오른 일이 적어선지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평일의 재래시장은 손님이 별로 없어 활기도 덜했다. 호객하는 할아버지 목소리에 돌아보니, 무좀에, 기억력 향상에 좋다는 각종 약재. 옆쪽으로 채소 상점들엔 애호박, 두릅, 참나물 등이 대용량으로 쌓여있었다. 봄나물을 보니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황사에, 추위에, 더위에 지구는 척박해지는데 여전히 땅을 뚫고 나오다니. 봄의 기운을 탄 생명들.
나는 매장마다 쌓인 ‘나물 탑’의 물량 공세에 우와- 놀라는 한편으로 걱정 오지랖이 발동했다. 남편에게 귓속말을 했다.
“다 팔릴지 걱정이네. 오는 손님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언제나처럼 태평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다 시장의 시스템이 있는 거지.”
“그래도 좀더 홍보가 되면 좋을 텐데. 아님 또 파는 루트가 있으시려나?”
대형마트보다 이런 재래시장이 더 흥미로운 것 같아,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게 신비로워. 협상도 더 유동적이겠지. 그치그치. 이 많은 물건들이 남으면 어디로 갈까?
대화하면서 걷다가 백반집에 들어가 청국장과 보리밥을 먹고 나왔다. 숙주와 애호박 반찬도 옆 상점에서 길어온 채소들일 것이다. 시장의 상생은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규모와 시스템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못 사고 나왔는데, 마트에서 장본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딱히 살게 없었다. 솔직히 시장에서 뭘 사는 게 익숙지 않아 낯을 가린 것 같다. 다음에 또 와서 사봐야지… 하고 느슨한 생각을 했다. 미나리의 송송 뚫린 줄기처럼 성긴. 또 게으르게 누워서 클릭 몇 번으로 구매할 확률이 높을 텐데 말이다.
집에 가니 엄마가 온라인 마트에서 사서 보낸 딸기가 도착해있었다. 그걸로 야매 딸기청을 만들었다. 유리병을 ‘열탕소독’ 했고, 빨간 딸기 15개를 골라 씻었다. 알룰로스로 당을 최소화해서 곱게 끓였다.
이번 집들이에 초대된 친구들은 와인과 소주 몇 병씩 들고 집에 왔다. 집들이 선물은 사지 말고 먹을 술만 가져오라 했기 때문이다. 예전 회사 연수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오는 시간 저녁 7시에 맞춰 냉이두부 솥밥, 달래장, 김파스타, 조개크림스튜를 만드는 중이었다. “어 음식 마무리만 하면 돼. 그동안 집 좀 둘러보고 있어봐봐.” “좋아. 우와 여기 웨딩촬영 사진 멋지다.” “이 방은 정리가 안됐네.” “이거 내가 선물준 핸드크림이지? 아닌가?” 친구들이 조잘거리는 소리가 집을 풍성하게 했다.
다행히 요리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언니, 냉이두부 솥밥 진짜 맛있다. 내 원픽.” “나도나도.” 칭찬을 들었다. 그들의 원픽인 솥밥은 30분 간 정성을 들여 지은 것인데, 역시 들인 시간만큼 맛있어지는 모양이었다. 10분 만에 휘리릭 만든 김파스타는 좀 남아있었다. “이것도 맛있어. 먹어봐!” 해도 별 반응이 없어서 내가 먹었다. 다음엔 공들여 간을 맞춰봐야겠어.
딸기청은 요거트에 곁들여 디저트로 내었다. 보기에도 예쁘고 봄의 맛이 났다. 우리는 제철 요리를 식탁에 두고 사는 얘기들을 했다. 어느새 그릇은 비고 인공적인 음식들(온갖 과자들)이 깔렸다. 남편도 같이 껴서 2시간 넘게 이어진 대화는 쌉싸름했다. 요즘 사는 활기있는 얘기도, 시든 얘기도 있었다.
활기 있는 대화 : 총선과 정치, 요즘 보는 프로그램과 영화들, 인간관계와 회사 고민, 오십번째 반복해도 새로운 우리 사이 추억들, 여행 계획, 노래 틀고 맞추는 게임하기, 보드게임 하면서 약 올리기.
시든 대화 : 연애 예능(하도 다양한 포맷으로 많이 봐서), 연예인 등의 가십거리.
대화 주제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들도 재밌었다. 사람마다 관심 있는 주제도 달라서 한 주제를 갖고도 누구는 시들고 누구는 활기를 띠기도 했다. 한 친구는 음식을 마저 먹다가 간장 속 다진 채소를 물끄러미 봤다.
“이 야채, 이름이 뭐더라?”
내가 봄나물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쌉싸래하고 달큰한 맛을 가졌다. 모든 피어나는 것들이 쌉싸름한 시간을 견디듯이. 나는 “달래”라고 답하고선 알싸한 맛을 혀로 느꼈다. 입안에서 모았다가 벌리니 봄 향기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다음 집들이 전에는 현금을 들고 시장에 가볼까, 관성을 이기는 것이 계절의 습성이니까 나도 좀 닮아볼까 싶다. 철마다의 시장 풍경이 궁금하기도 하다. 열심히 피어날 채소들도. 자꾸 눈길을 줘야 시장도, 채소도 활기를 띨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