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평양냉면과 드렁큰 직장인
무더웠던 한여름, 논현동에서 유명한 평양냉면집에 갔다. 저녁 8시였는데도 줄이 길게 늘어섰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빠질 줄을 몰랐다. 나는 기다리면서 동행에게 불평했다.
“아니, 평양냉면이면 10분 컷으로 다 먹겠구먼, 왜 이렇게 안 빠져?”
동행은 포기하고 다른 데 가자면서 말 했다.
“이거 안 빠질 거 같아. 저기 봐. 다 술 시키고 있는 거.”
“?”
과연 테이블마다 소주병들이 빼곡했다. 양복 입은 직장인들과 면티를 입은 사람들 모두 평양냉면에 소주를 기울이고 있었다. 좀처럼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면을 다 먹고 국물만 남은 대접을 각자 앞에 두고 국물만 떠먹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불콰해서 잔뜩 흥분해 있는 얼굴들이 동동 떠다녔다. 이 여름에 평양냉면만 보고 강남에 왔건만 들어갈 시간이 너무나 요원했다.
“아니 무슨 냉면에 소주야~?”
의아해하던 나는 30분 후에야 간신히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동행에게 목소리를 줄여 반복했다.
“아니 무슨 냉면에 소주야~? 여기서 회식하는 것도 아닐 테고…”
“왜 못해?”
아차, 하며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려 평양냉면집에서 거래처 회식을 하던 날.
“평양냉면에 소주 궁합이 얼마나 기막힌 줄 알아?”
라고 내 상사는 말했었지. 빈 잔들을 모아 소주를 말면서. 그때 소주값은 4천 원이었던가. 과연 슴슴하고 구수한 냉면 국물에 톡 쏘는 알코올의 궁합이 묘하고 좋았다. 세 번 정도 젓가락질을 하다 보니 술과 냉면 국물이 섞이며 신선한 맛이 났다. 얼음이 소주의 쓴맛을 얼얼하게 해주고, 위장 속에서 한 데 섞여 알코올도 흐려지는 해장 조합이었다. 괜찮은데…? 회식 때면 소주 한 잔도 꺼리던 내가 몇 잔을 비우게 만들만큼.
그때 경험한 맛을 이렇게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었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냉면처럼 쿨한 미식가들의 품격은 없었고 모두 소리 지르면서 말하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이에 묻히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악순환이 식당의 데시벨을 끌어올려 폭파하고 있었다. 우리 테이블에만 소주병이 없었다. 손으로 젓가락 대신 귀를 잡고 싶어졌다. 냉면과 만두를 10분 안에 끝내고 나왔으니 진정한 안주 킬러였다. 우리 같은 사람이 많다면 줄 설 일도 없을 것이다. 조용히 먹고 싶은 내향인들을 위해 바 형식으로 된 평양냉면집이 있으면 좋겠다. 마치 와인바 같잖아? 평양냉면과 와인의 조합은 또 어떨까. 소비뇽 블랑이 잘 어울리겠지. 문을 열고 나오니 여름 냄새가 훅 끼치는 밤의 거리가 너무나 고요했다. 술꾼들이 없으니 세상 살 만하네.
많은 직장인들은 그렇게, 냉면집에서도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다. 언택트 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직장인들은 퇴근하고 어딘가로 향한다. 나와 같고 또 다른 처지의 사람들과 알코올을 수혈하러. 가끔 강남역이나 선릉역 같은 도심지에 갈 때마다 수많은 술집들이 간판을 빛내며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 많은 술집들이 평일 저녁에 꽉 찬다니, 모든 도시인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 같다. 낮의 자연광이 사라지면 진정한 하루 2막을 여는 축제를 한다. 그 포문은 퍽-하고 병 따는 소리로 시작되곤 한다.
테이블에선 술병이 오롯이 비비드하게 빛나고 나머지는 무채색이다. 무리들의 눈동자에는 술병이 반사되어 보인다. 사람들은 그 광채에 이미 홀려있다. 가끔 병을 수거하러 오는 직원은 센스없는 사람이 된다. 다 마신 술병은 모아서 인증샷을 찍고 전시해야 하니까. 직장인 문화는 왜 유독 술과 떼놓을 수 없게 된 걸까.
“직장 스트레스는 술로 풀어야돼. 사회생활 하면 사는 낙이 술이지 뭐.”
라는 말을 누군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
과연 사회생활은 대학 생활과 비교도 안 되게 힘들긴 했다. 돈과 일자리가 걸려있을 때 사람들은 극도로 예민해지니까. 인간관계는 살얼음판 같고 매일 지옥철로 출퇴근하고 돈 벌기 더럽게 힘들다… 항상 나보다 먼저 한숨을 내쉬는 직장 동료가 있었는데, 그 한숨에 묻어서 나도 숨을 훅하고 내쉬었다. 둘의 한숨은 사무실의 적막을 타고 공기에 짙게 배어 어깨를 짓눌렀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계 속 어느 기구한 부품이 된 기분을 시시각각 느꼈다. 자기 힘으로는 분리될 용기도 잘 못 내는 부품. 무엇이든 내가 돈을 주면 행복하고 돈을 받으면 불행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학생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땐 왜 몰랐을까 지금은 이렇게 명확한데. 과거의 고민과 괴로움은 해가 갈수록 작고 시시해 보였다. 그나마 학생 때 비축해둔 힘으로 지금껏 버티는 걸까? 그래 현대인의 포션, 술로 일단 버텨보자. 떨어지는 에너지와 약발을 빠르고 편하게 채우기 위해.
전 직장 동료 A는 우리 회사를 떠나 스타트업에 간다고 했다. 나는 스타트업에 대해 궁금해져서 물었다.
“A씨, 거긴 복지가 어떻대요?”
“복지는 여기가 더 좋을 수도요. 근데 사내에 맥주 바가 있댔어요. 무.제.한.”
“대박. 그럼 취한 채로 일할 수 있겠다.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은 손해네요.”
“그러게요. 일단 임원진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겠죠? 좀 걱정돼요.”
“커피 심부름 술 심부름, 뭐든 안 당하길 기도할게요…”
“진짜. 체험해 보고 얘기해줄게요.”
A씨는 퇴사하고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체험기를 듣진 못했지만 미디어업계 스타트업에서 맥주와 함께 커리어를 쌓아갈 A의 모습을 상상했다. 뭔가 화끈하고도 쿨해 보였다. 그 회사 직원들은 회의하다가 답답해지면 맥주 바로 달려가 화를 풀면 되겠네. 사내 카페 티타임 대신 비어타임을 가질 것이고. 가끔 술 마시고 일을 하면 약 빤 것처럼 더 잘될 때가 있지 않은가? 술로 분위기를 무마해버리면 회사에 대해 개선점을 얘기하기도 힘들 것이고. 높은 분들은 알콜성 노예들을 잘 구슬려 가며 일 시키는 장치를 마련하는 걸 이젠 대놓고 한다. 자본주의는 참 누가 교묘하게 잘 부려 먹나 퀘스트를 깨가는 게임 같다. 애초에 누구를 위한 복지란 말인지.
다들 요즘 사람들은 회식을 싫어할 거라 생각하지만, 회식으로 회사 다닐 낙을 찾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었다. 전 회사에서도 그런 부류들이 있었다. 영업과 진급에 재능이 있던 그들에겐 술 동료를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가 회사였다. 오늘 번개할 동료를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니고, 좋은 회식용 맛집도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 주로 남자들. 그들이 맛집 블로그를 하면 잘될 것 같은데 아마도 술 마시느라 포스팅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회식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대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내게 메신저로 말을 거는 순간 집에 갈 핑곗거리를 시뮬레이션했다. 할머니가 아프셔서요, 중요한 선약이 있어요, 컨디션이 안 좋네요 등등.
그들은 거래처 사람들과도 심심하면 회식을 잡았는데, 이번에 저쪽이 샀으니 다음엔 그쪽이 한턱내는 식으로 핑퐁처럼 주고받다가 거래 관계가 끝나면 공을 놓고 데면데면해졌다. 술자리에선 세상 친했어도 낮에 차 한잔하자는 말은 어려웠나 보다. 매일 얼굴 보며 근황과 고민을 살뜰히 주고받던 직장 동료도 퇴사하면 남이 됐다. 메신저 친구 목록엔 ‘이 사람 누구더라?’ 한참 고민해야 기억나는 몇 년 전 퇴사한 사람들, 거래처 사람들의 이름이 테이블 아래로 폐기되는 술병처럼 쌓여만 갔다. 주기적으로 그 이름들을 삭제하며 생각했다. 술친구의 힘이란 약하기도 하지. 술로 이어진 끈들은 손짓 한 번에 허망하게 끊겼다. 소주 뚜껑 꽁다리가 끊어지듯이.
3년 전 회사 송년회 자리였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자 과장이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엎어져 테이블과 한 몸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은 집에 가라고 해도 절대 가지 않는다. “과장님, 그만 일어나서 가세요. 택시 잡아드릴까요?” 해도 듣지 않았다. 급기야 같은 테이블에 있던 임원에게 혀 꼬부라진 소리로 “형”이라며 어깨를 쳤다. 임원은 너그럽게 받아주었지만 그의 추태는 계속됐으니… 우리는 물음표와 느낌표가 동시에 뜬 표정으로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하, 과장님이 왜 저러실까. 과장님은 못 말려’ 식으로 웃으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형, 저번 회의 때 왜 그랬어?”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인데 중년 남성의 징징 메들리는 더욱 들어주기 힘든 것이었다. 임원의 표정이 굳어가자 몇 명이 일어나 그를 다른 테이블로 보냈다. 다행히 해프닝 정도로 끝났지만, 다른 회사에선 종종 서로 욕하거나 성추행하거나 때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다. 지인의 회사 동료는 술에 취해 상사와 회사 욕을 하다가 최근에 잘렸다. 이쯤 되면 정말 직장인을 살리고 또 죽이는 것이 술 아닌가.
당장의 회사 생활이 힘든 직장인들은 이를 외면한다. 일상과 건강이 어긋나는 징조들을. 술을 마데카’술’ 삼아 바르고 메울 뿐이다. 다음날 일하려면 임시로 상처를 봉합해 줄 연고가 필요하다. 자잘한 마음의 상처 따위는 술의 힘으로 숭덩 꿰매버리고 사람들은 출근길에 나선다. 터져버리지 않도록 술이라는 액체로 화를 잠그면서. 오늘 받을 스트레스, 전화와 메일, 면담과 회의, 피곤과 환멸이 술이라는 매혹적인 마무리로 해결될 것을 믿으면서. 어떻게든 하루는 끝날 테니까. 여러 믹스앤매치를 시도해 보다가 마침내는 평양냉면과 소주의 찐한 궁합을 아는 드렁큰 직장인으로, 냉면집에서 붉은 얼굴로 열과 목청을 울리는 전문 회식인으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15~49세의 젊은 성인에게서 조기사망과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은 술이 1위래요. 조금만 복용해도 신경계 독성이 있는 물질인 것이죠.
*직장인 헌정 글. 평양냉면의 계절이 오고있네요. 강남구청역 진미평양냉면 강추드려용 ..^^ 또 추천해주실 평양냉면집 있으면 답장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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