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조개 껍질로 추는 춤
서해안 선녀바위 해수욕장에서 35명 넘는 여성들과 1명의 남성이 다 같이 훌라를 췄다. 훌라 의상인 ‘파우’ 스커트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머리엔 꽃과 조개 모양 핀을 달고서. 오늘은 바다에서 훌라 수업을 하는 원데이 클래스 날이었다. 휴양지에 어울리는 ‘Royal Hawaiian Hotel’ 노래를 배웠다. 하와이에서 호텔 개관을 축하하며 불린 곡. 훌라 스승 하이는 바다를 등지고 서고, 우리는 바다를 보며 안무를 췄다. 이 곡엔 빠르게 한 바퀴 도는 동작이 있는데 하다 보니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다들 난감하게 하하 웃고 비틀거렸다. 술 취한 사람들 같았다.
서해 바다는 바닷물이 빨리 사라졌다. 우리는 총 3시간 정도 바닷가에서 놀았는데, 시시각각 바닷물은 저 멀리 도망가고 까만 바위가 드러났다. 처음 와서 사진 찍을 때까지만 해도 해변가에 찰랑거리는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다.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는데, 그 차가운 물이 해변 모래의 열기까지 함께 데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디까지 달음질치려나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봤다. 햇살 때문에 눈이 자꾸 찡그려졌다. 5월인데도 그랬다. 오후 4시의 햇빛에 윤슬이 넘실거렸다.
요즘 우리가 배우는 곡은 ‘Pearly Shells’이다. 진주조개, 진주만에 어서 오라는 가사. 이 노래는 1, 2절은 영어로 돼 있고 3, 4절은 하와이 원주민 언어로 부른다. 나는 원주민 언어 파트를 훨씬 좋아한다. 신화 같은 가사를 가진 이 노래엔 ‘상어 여신’도 등장한다. 파도를 가르는 상어 여신 동작은 양손으로 요리조리 헤엄치는 걸 표현하는 거라 아주 재밌다. 조개를 뜻하는 Pupu 라는 귀여운 발음을 따라 하면 파도에서 푸푸, 어푸어푸하며 조개껍질을 주우러 다니고 싶어진다. 마침 오늘 바다로 훌라 수업을 온 기념으로 머리에도 조개모양 핀을 꽂고왔다. 둘러보니 다들 조개 모양 핀이나 꽃핀을 꽂고왔다. (물론 대중 교통에서부터 하고 온 건 아니고, 이곳에 도착해서 훌라시스터즈로 변신했다.)
우리는 스승이 하는 건 뭐든 따라하고 싶었다. 대지에 살을 맞대고 맨발로 추는 그녀의 모습 또한. 그래서 해변에서도 맨발로 췄는데, 조개 껍질이 모여있는 곳을 디디면 발바닥을 찔러 꽤 따가웠다. 춤을 추기 전, 큰 껍질들을 다치지 않게 빼두는 작업을 했다. 조개껍질은 흰색이고 물결무늬가 있었는데, 시퍼렇게 멍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큰 것은 굴 정도, 작은 것은 바지락 정도. 누군가는 사진찍으러 빨리 걸어가면서 조개껍질에 따가워 악 소리를 냈다. 어떤 ‘쌤’ (시스터즈들끼리 서로를 ‘쌤’이라고 부른다.)이 그걸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인생에서 이건 암것도 아냐 쌤!” 우리는 다 같이 웃었다.
훌라 시스터즈들은 돗자리를 펴고 앉아 바다를 같이 바라봤다. 동그랗게 둘러앉지 않고 모두 바다 쪽을 향해 앉은 채. 가져온 김밥, 도시락, 과자들을 꺼내서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다정한 눈빛과 웃음을 나눴다. 다들 자신에게 찰떡같이 어울리는 의상들을 입고 왔고 서로 ‘그거 어디서 샀어요?’ 하며 정보 공유도 했다. (나는 친환경 랩스커트인 ‘사롱’과 하와이 전통 스커트 ‘파우’를 준비해 왔다. 모두 하늘색 계열.) 여자 친구와 함께 온 남성도 있었는데, 알차게 꽃핀을 꽂고 파우를 입고 와서 우리를 흐뭇하게 했다. 돌아가면서 소감을 말하는 시간, 한 명씩 일어나서 소개를 하는데 서로 “귀엽다~” 까르르 웃으며 사진도 찍어주었다. 낯가리는 성격의 내게도 참 편안한 시공간이었다. ‘환대’라는 단어를 이 시각 잘 실천하고 있는 공동체 중 하나가 아닐까.
나는 한창 오랜 가정사 때문에 맘고생을 하던 차라 중간중간 울적해지는 기분을 어쩌지 못했다. 사는 게 왜 이러냐 조개껍질이 날카로워 보이는데 손 베이면 아프겠지? 그냥 바다에 잠겨있으면 어떨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입꼬리도 내려갔지만 바다와 훌라의 기운을 받고 있으니 양지에 나온 것 같았다. 음지에서 양지의 햇살을 느끼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시스터즈들 중엔 깜찍한 여자 어린이를 데리고 온 분도 있어 계속 눈길이 갔다. 그 아이가 안경 쓰고 수줍게 웃는데 부끄럼 많던 내 어릴 때가 생각났다. 뽀얗고 작은 손으로 모래성을 쌓고 조개껍질을 붙이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제 모래를 보고 모래성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데 말이다. 아이는 조개껍질의 간격을 적당히 띄워서 장식하며 모래가 숨 쉴 수 있는 여유도 주었다. 모래 표면에 눈송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5월 볕 좋은 날에 내린 눈. 그 눈은 바닷가에 송이송이 앉았다. 어른들은 온통 나가서 훌라를 추는데, 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얌전히 바라봐주었다.
1시간 정도 땀 흘리며 훌라를 추던 중, 주변 사람들이 구경하다 사진을 찍거나 “이거 무슨 동호회예요? 학교에서 하는 거 아니구?” 물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네 학원, 동호회 같은 거예요!” 했다. 해변에서 30명이 넘는 여성들이 꽃핀을 달고 화려한 복장을 입고 단체로 추는 광경이라니. 얼마나 진기했을까. 사실 집단 내부에 속하면 그게 진기한 줄도 잘 모르지만.
6시쯤 되자 해가 뉘엿뉘엿 밑으로 내려갔다. 몇몇은 더 남아서 지치지도 않고 그간 배운 곡들을 더 추었다. 스승 하이는 마무리 소감을 말하면서 행복한 나머지 울컥하기도 했다. 40명 가까이 모인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는듯했다.
“실제로 좋은 일이 일어나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나에게 온 일을 축제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하고, 축제처럼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저는 훌라를 접하고 항상 행복했어요. 내 운명을 축제로 열어버리는 거예요. 나중에 이 순간을 기억하면 반짝거리고 그리울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모두의 아름다운 순간을 이어주어서 다같이 바다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았다. 시스터즈들의 박수치는 양손날들이 덜그럭 거리며 맞부딪히는 조개껍질들 같았다. 스승의 인생 또한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텐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당찬 그녀는 성큼성큼 조개껍질을 맨발로 밟고 새로운 세계로 앞서 가고 있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모래에 잠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는 하이훌라 수업을 듣고 있답니다 :) 스승의 평안을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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