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혼자 산토리니에 가다
신혼여행의 성지, 로맨틱한 사랑의 종착역이자 증거와 같은 여행지 산토리니. 나는 왜 혼자, 여기 산토리니에 왔는가? 주변에선 “진짜 혼자 거길 간다고? 푸훗” 하며 비웃었는데, 나는 오히려 별생각이 없었고 겁도 없었다. 거기 가서 처량할까 봐, 커플들을 보고 부러울까 봐 별로 걱정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왔다. 커플을 보며 심술 내고 질투하는 건 20대 초중반 때 많이 해봤고 이제 20대 후반이라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또 언제 기다린단 말인가? 지금 애인도 없는데 언제 또 사귀고 언제 또 결혼하고… 그날이 너무 멀거나 혹은 안 올 것 같기도 했다. 좋은 사람 안 나타나면 혼자 살지 뭐, 산토리니도 아끼지 말고 지금 가보자. 혼자여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아름다운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 바다와 구름 같기도 한 그 색깔들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아테네에서 Olympic Air 탑승해서 1시간을 타고 산토리니 공항에 도착했다. 단체 관광객과 신혼부부가 한가득이다. 산토리니는 기원전에 일어난 화산 폭발로 초승달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의 큰 섬과 2개의 작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산토리니는 피라 마을과 이아 마을 2개로 나뉘는데, 보통 피라 마을에 숙소를 두고서 버스를 타고 이아 마을을 왔다 갔다 한다. 이아 마을이 더 아름답고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피라 마을은 테토코풀루 광장이 시내의 메인이었다. 밤에도 상점들과 숙소에서 켠 불빛 때문에 불야성을 이룬다. 피라 정류장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한참이었다. 힘들게 짐 끌고 걸어가고 있으니 걸어가던 사람이 “5분만 더 가면 피라예요.” 해서 힘내서 걸었는데 30분은 넘게 더 걸었다. 걷는 길에 있던 숙소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 이 동네에는 상점이든 숙소든 모두 흰 벽에 파란 돔 또는 파란 국기를 달 것을 법으로 지정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내 숙소가 어디인지 잘 눈에 익혀놔야 한다. 버스는 시간표가 정해져 있고 딱 정시 출발이라 다니기 편하다. 서울의 마을 버스마냥 작은 버스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큰 관광버스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다는 얘기다. 검찰원이 옛날 ‘오라이 직원’처럼 버스를 같이 타서 직접 돈을 걷고 종이 표를 꺼내준다. 그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동전 수거기는 신기하게 생겼다. 예전에 은행에서 딱 한 번 본 것 같다. 버스가 출발한 지 20분 만에 이아에 도착해서 너무 짧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흰 외벽과 골목골목 예쁜 카페와 상점들, 블루돔과 어우러진 국기들과 푸른 바다. 대리석 바닥이 아름다워 ‘마블 로드’라고 불리는, 숨 막히는 풍경들이었다. 사유지, 종교물들이 많은데 블루돔들과 전망 좋은 곳에 가까이 가서 찍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함부로 걸어 다니면 주인이 뭐라 하거나 경찰을 부르기도 한단다. 돔 위를 걸어보니 특별한 경험이었다. 신이 나를 놀래키면 난 바다로 떨어질 것이고 날 좀 봐주면 살아남을 것이다. 생각보다 돔 크기는 거대했고 바다가 잘 내려다보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흰 벽에 파란 지붕, 조금 뻔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인이라면 포카리 스웨트 노래, 광고로 기억할 것 같은 산토리니의 전형적인 이미지 그대로였다. ‘파랑 나라를 보았니’ 노래에 나오는 천사의 마을 같았다. 이 흰색이 새것처럼 흰 까닭은 부활절 전 주민들이 정화 석회를 열심히 흰색으로 칠하기 때문에 흰색을 유지할 수 있다고. 그 흰 벽 앞에서는 뭘 갖다 대도 화려해 보였다. 그만큼 희지 않은 이상 지나가는 사람들과 벽에 드리운 담쟁이와 붉은 꽃이 아주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벽들을 지나가면서 조금 부끄러움도 느꼈다. 이 아름다움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더 즐거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난 좀 더 마음을 열고 걸어 다녔다.
그리스엔 자주색 핫핑크 꽃들이 많아서 화사함을 더해준다. 단조롭지가 않다. 문들도 하나하나 예쁘게 치장돼 있어서 한걸음마다 포토스팟이다. 분홍색 문을 가진 건물도 있었고, 성채 쪽으로 올라가니 <맘마미아> 속 한 장면처럼 바다가 펼쳐졌다. 휘날리는 국기, 햇빛을 받아 그림자가 지는 흰 종탑, 흰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을 보았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사라지고 새파랗기만 했다.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교회의 종탑, 종이 걸린 장식물들이 특이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 어쩜 국기도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인지, 국기를 보고 산토리니를 지었나 아니면 산토리니를 보고 국기를 그렸나.
신혼여행 하는 커플들이 실제로 정말 많았다. 발에 채일 정도로, 거리의 절반 이상이 커플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 그리스의 위상보다 외국에서의 위상이 훨씬 높은 편이다. 한국의 인기 신혼여행지는 하와이, 몰디브 등인데 외국에선 산토리니를 로망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멋진 선글라스를 낀 외국인 여성들은 파란 맥시 드레스를 입고, 몸좋은 남편 또는 남친을 대동한 채 멋드러지게 신행 스냅을 찍고 있었다.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안고 키스하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는 그걸 보고 다행히 부럽진 않았다. 한국인이 거의 없어서 감흥이 덜하기도 했고, 오히려 난 희소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 솔로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근데 지금 혼자로도 충분히 안 외롭고 즐거워. 이런 감정으로 가득 차서 심지어 계속 미소를 띠고 다녔다. 오히려 사람이 너무 많으니 나는 묻혀버렸다. 인파에 휩쓸려 다니느라 외로울 새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이아 마을이 발에, 눈에 익기 시작하자 나는 나름의 사소한 즐거움을 찾아보았다. 이곳엔 아틀란티스 서점이란 유명한 명소가 있다.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속같은 이색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무질서하면서도 잘 꾸며놓았다. 신화 그림책도 있었고, ‘인생에 고민이 있니?’ 등 질문이 쓰여 있는 엽서가 있었다. 괜히 마음에 와닿았다. 사라진 공간, 아틀란티스를 서점 이름으로 붙인 것도 좋았다.
6시 반 가까이 되면 다들 노을을 보기 위해 굴라스 성채 쪽에 자리 잡고 준비를 한다. 성채에서 보는 풍경이 제일이라지만 자리가 꽉 차서 나는 근처 아래 계단에 앉았다. 그러다 아쉬워서 다시 성채로 낑겨서 보았다. 풍경은 기가 막혔다.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바다를 접한 쪽을 바라보고 선 거대한 풍차는 이 풍경의 특별함을 더해줬다.
점점 노란빛 물드는 해를 받아 색색이 변하는 바다와 건물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이 풍경만을 기다리고 살아온 것처럼 손을 모으고 바라봤다. 서로 아주 밀착돼서 불편했지만 그걸 상쇄할 만큼 아름다웠다. 어떤 중국 아저씨가 우렁차게 핸드폰으로 BGM을 틀었다. 모두를 위한 데이터 희생인지, 웅장하고 잘 어울려서 좋았는데 나중에 트로트 같은 음악을 틀길래 좀 깼다. 그거 아니야 아저씨…
빨간 해가 어느새 고개를 밑으로 향하자, 풍차 건물을 위시해 흰 건물들이 신비롭게 변한다. 빨간 바다와 보트, 요트들. 할 말을 잃고 입 벌리며 봤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변하는 하늘 색감에 가장 걸맞은 아름다운 풍경을 완성하려 이 모든 마을 건물들을 지은 것 같았다. 같은 곳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관광객들이 저마다의 탄성을 질렀다. 이 동네의 사람들은 어떨까. 이 노을을 매일같이 본다면. 태어난 사실에 감사해질 정도의 순간을 매일 본다면. 축제 같은 이 순간에 여기에 있다니 꿈결 같다. 산토리니를 혼자 가면 외로울까 봐 걱정하던 주변 말들이 무색하게, 혼자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도 좋았겠지만, 노을의 아름다움은 공평했고 굳이 말로 감상을 나누지 않아도 충분했다. 지난 사랑들을 생각해 보면 남자 친구와 왔다 해도 이보다 좋았을 것 같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추천해야지. 혼자라도 가보라고. 우리는 혼자가 되기 싫어 놓치고 사는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외로울 걸 겁내면 더 큰 걸 놓치는 걸 수도 있다. 혼자라도, 뭐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새삼 생각했다.
해가 떨어지고 건물들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영화 관람을 끝낸 사람들처럼. 곧 떠나버렸다. 나는 폰 배터리도 다돼서 오직 눈으로 이 장면들을 담았다. 불빛들이 은은한 노란빛으로 밝혀져 별이 뜬 것 같았다. 수영장 물들은 옥빛으로 빛나고 건물의 불빛들이 처음엔 풍경으로만 다가와 사진으로 담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사진을 멈추자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에도 밤에 별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꺾인 채로 한참을 걸었다. 떠나간 자리에는 고요한 파도 소리가 철썩였고 별의 차르르 소리만 들렸다. 딱히 요즘 상황에 있어서 감사할 건 생각도 안 나지만 괜히 감사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밤의 순간만으로도. 혼자로도 완벽히 빛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눈을 떴다. 짧은 산토리니 체험이 아쉬워서 마지막까지 알차게 보고 싶어졌다. 버스를 타고 Kamari 해변에 도착해서 선베드에 앉았다. 여유로운 지중해 햇살을 즐기며 조용한 아침 바다, 검은 돌 해변을 봤다. 아침이라 사람 없이 한적했고 노란색 해가 바다에 반짝이를 뿌렸다. 선베드 위엔 짚으로 지붕이 지어져 더 휴양지 느낌이었다. 현지인 느낌을 풍기는 곱슬머리 아줌마는 혼자 수영을 하고 있었다. 지중해 바다를 손으로 만졌다. ‘그리스인 조르바’ 생각이 났다. 이런 바닷가에 머물면 여유와 평화가 생기겠다. 나는 계속 맘마미아 노래를 속으로, 작게 소리내서 불렀다. 혼자 수영하는 아줌마는 점점 멀리들어가고 있었고, 혼자 온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된 듯한 온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다음에 누군가와 한 번 더 와야지, 라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인생에 한 번 충만한 경험이었다.
*제가 솔로였을 시절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요즘 건강 문제로 심란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어요 ㅎㅎ 모두 건강 조심하시고요, 그리스 여행이 궁금하시면 메일로 물어보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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