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디지털 시대의 비극
디지털 시대에서 비극이란 이런 것이다. 가령, 20년간 모아온 모든 자료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 외장하드가 먹통 되는 것. 멀쩡하던 아이폰에 벽돌 현상이 발생하거나, 누가 폰을 훔쳐 가는 것. 사람들은 디지털상에서 당한 범죄에 관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실체가 없다는 거겠지. 야, 어차피 머릿속에만 있을 뿐인데 그냥 털어버려. 근데 요즘엔 디지털이 전부일지도 모르는데. 내 몸은 존재하지만 정신은 디지털로 실시간 연동되고 가끔 백업되는 듯하다.
손 편지나 일기장에 손으로 적지 않는 이상, 내 모든 생각의 흔적은 넷상에 공간을 차지하고, 2.5MB 따위 용량으로 저장되어 있다. 코딩, 컴퓨터 용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어떻게 나의 수많은 사진이 파일 제목과 용량에 따라 분류되고 다시 그 정보값이 불러와지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어떤 발명보다도 컴퓨터의 발명이 위대해 보인다. 아무튼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걸 다 잃는다면 내 과거는 깨끗이 없던 일이 될 거라는 걸. 존재한 적도 없는 것처럼. 또, 내 목숨이 파일명들에 달려있다는 것. 나의 지분은 디지털상에 더 많을 지도. 내가 죽고 나면 디지털에서 내가 증명되고 계속 살아질 것이다.
예전의 나는 이런 애였다.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들과 십몇 권의 일기장들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애. 만약 불이 나면 내 일기들은 어떻게 구하지 망상하는 애. 친구들은 말로는 아니었지만 편지를 쓸 땐 좋은 말만 써줬기 때문에 그 종이들을 자주 들춰보았다. 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이 준 알록달록 예쁜 편지들은 잃어버리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상실에 대한 걱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덜렁거리는 타입이니까.
점차 그 걱정은 디지털로 자리를 옮겨갔다. 지하철에 노트북을 깜빡하고 놓고 내려 역무실로 달려가 사정사정하여 되찾은 적이 있고, 폰도 두 번이나 도둑맞았다. 소매치기로 유명한 유럽이나 인도에서 당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물건은 잃어버려도 조금 타격 있고 말지만 자료들은 다시 살 (Buy) 수가 없다.
한번은 멀쩡히 있던 아이폰이 벽돌이 되어버린 적이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전원을 껐다 켜보고 인터넷에 비슷한 사례를 검색해 보고, 부리나케 ‘아이폰 수리점’으로 뛰어갔다. 돌아온 대답은 “자료는 다 날라가요.” “네? 방법이 없을까요?” “없어요. 그전에 사진이 너무 많았어요. 용량에 비해서. 미리 백업을 해놓으셔야 돼요.” 그 사진들을 잃어버렸을 때의 먹먹함은 내 온몸을 짓눌렀다.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비극은 불길한 전조 한번 없이 와서 더 무섭다. 한 번에 그 많은 자료가 1초 만에 허공에 흩뿌려진다는 것이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소리 없는, 대답 없는 재난. 날려본 사람은 안다. 그 무서움을.
그렇게 몇천 개의 영상과 사진을 날린 후로 내가 한 것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가만히 명상하듯이 앉아 떠올려보면 사진이 복구되기라도 할 듯이. 9월 2일은 뭐했었지? 그래, 올림픽공원에 갔어. 거기서 난 검정 가죽자켓을 입고 있었고, 핑크뮬리가 핀 곳을 걸어 다녔지. 그 사진들이 어떻게 생겼더라. 나는 주로 오른쪽에 자리를 잡으니까 너는 내 오른쪽에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몇 명 같이 포착됐을 거고, 햇볕은 어디에서 왔더라. 그때 하늘색은 어느 정도의 채도였지? 장면의 이미지를 산책하듯이 복기해서 마음에 새겨놓는다. 뇌 속에서 안 잃어버리고 싶은 풍경과 기억이 너무 많아진다.
새해 첫날엔 버스에서 내리는데 찍을 카드가 없었다. 교통카드로 쓰던 신용카드 1장을 잃어버린 거였다. 남편은 내게 조심성이 없다며, 반성을 안 한다고 조금 뭐라했다.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그러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절대 까먹지 않도록, 실수를 했을 때 스스로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가령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후,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가는 식으로 고통을 주는 것) 그러고 보니 나는 내 실수를 관대히 여겨왔던가? 앞으로 물건을 잃어버리면 오래 걷는 벌을 주면 되겠다. 그런데 디지털 자료를 잃으면 어떻게 벌주어야 하나? 오래 걷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당분간 스스로가 싫어지는 것이 벌일 것이다. 기계가 잘못했을 땐… 기계에 벌을 주는 방법이 개발되길.
P.S. 나는 그래서 한 번씩 그 해의 사진들을 모아 포토북을 만들어둔다. 디지털만 믿을 수 없다!때로는 아날로그가 더 믿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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