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멀티버스
멀티버스 속 나의 캐논(canon), 공식 설정은 뭘까? 인생의 모든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된다는 것. 그런데 큰 줄기는 정해져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약간 사주 같기도 하잖아?
"네 인생의 큰 가이드라인은 정해져 있어."라고 점집에서 자주 들었다. 그런 데선 꼭 빠져나갈 구멍도 같이 얘기했다. "뭐, 자잘한 건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긴 하지."
몇 번을 태어나도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반복될 순간. 무신론자인 나는 누가 내 인생을 정했는지 모를 일이다. 멀티버스가 클수록 나는 여러 개로 쪼개질 텐데, 나1, 나2, 나3이 모두
비슷한 흐름으로 살까? 나는 답이 안 나오는 답을 구하려고 가끔 쓸데없이 열중한다.
<스파이더맨>에서 마일스는 거미에 물린 후 능력이 생겼다. 처음엔 부정하지만 영웅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성장한다. 동시에 영웅에겐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마일스는 정해진 불행, 모든 스파이더맨이 받아들이는 희생(아버지/삼촌의 죽음)이라는 ‘캐논 이벤트’를 벗어나려 한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쓸 거야.”라는 쿨한 대사를 날리고는 뜨겁게 아래로 추락한다.
스파이더맨에게 추락은 비상이니까.
다른 멀티버스 세계에선 지금 버전에서 뭘 포기하거나 더할 수 있을까? 과거의 시간은 젠가처럼 얽혀있다. 촘촘한 부분도, 헐거워서 한 손가락으로 쉽게 빠지는 부분(이벤트)도 있다. 하나를 빼면 나머지 블록들과 함께 와르르 무너질 결정적 순간이 뭘까 궁금해진다. 어떤
세상에선 내가 대학에 안 갔을 수도, 의사가 된 비혼 여성일 수도 있다. 또는 히스패닉 남성일 수도.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 내 이야기를 직접 쓰기로 결정한 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또는 여행에서 밤하늘을 본 날, 중요한 사람과 만나거나 헤어진 날, 가족과 같이 축하하거나 크게 싸워서 뭔가가 망가진 날, 예술 작품을 보고 충격받은 날. 나도 모르게 세상에 없던 뭔가를 만들어 낸 날. ‘이날 이후로 영영 인생이 달라질 것만 같아.’ 하는 감각은 물감이 스며들듯 발소리도 없이 오곤 한다.
모든 건 나중에 가서야 의미를 안다.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라고. 지금 버전의 평범한 나는 망상할 수밖에 없다. 안전하게 지금의 인생을 꼭 붙잡은 채로. 많진 않지만 지금 가진 것들조차 스르륵 빠져나갈까 봐 바닥을 디딘 채 발가락을 구부려 본다.
앞으로 뭘 잃고 뭘 남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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